[오월이들2기] 5.18 민중항쟁 행사위와 오월어머니집 방문. 서글픈 역사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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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행사위와 함께한
오월어머니집 방문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어머니들의 쉼터"
안녕하세요.,
518행사위에서 5.18 민중항쟁에 대한
온라인활동 오월이들 멤버 참새에요.
지난 평일, 따뜻한 햇살이 가득받고
518행사위 담당자 선생님과
오월이들 일행들과 방문했어요.
양림동에 위치한 이 곳은,
5.18민주화운동때 가족을 잃은
어머니들의 쉼터입니다.
저 역시도 광주살면서 처음 방문했던
"오월어머니집"에 대한 소개와
어머니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 들려드릴게요-
요가 및 건강관련 프로그램과 교육문화사업,
오월정신계승사업(주먹밥나눔, 시위 집회 등 참여투쟁)/
연대 및 교류사업, 오월정신 지속 교육사업 등
1980년대 오월의 정신을 이어나가는 곳이었어요.
다른 센터?와는 다르게
"포근하다"라는 느낌을 주는 센터(사무실)이었어요.
실제 어머니들이 와서 쉬어가는 공간인지라
쉼터라는 이름으로 어머니들의 공간이자
또 시민들이 오며가며 언제든 들릴 수 있는 곳으로
마련된 곳이라고 했어요.
사무총장님 말씀을 잠시 빌리자면,
" 다른 단체하고는 약간 저희가 좀 틀립니다.
우리 어머니집은 편하게 누구나,
어머니들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지나가다가 편하게
누구나 들어오셔서 보고 쉬었다 갈 수도 있고.
차도 마시고 화장실도 보고 가고
그렇게 개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쉼터 기능이에요"
라고 하셨어요.
오며가며 양림동에 들리시면 한 번 들려보세요!
오월이들이 방문한다고하셔서
따뜻하게 과일과 간식을 나눠주셔서 먹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나누는 시간이었어요.
이야기의 주제가 다소 무거울..?수도 있었다만
어머니들의 생생한 증언들과, 이야기들이
다음세대로서의 기억하고 나아가야할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이야기 중간중간에 눈물고여서...
어금니 꽉 깨물고 그랬었어요 힝 ㅠ0ㅠ
코로나로 인해, 어머니들이 많이 못나오시고
기회가된다면 같이 오월정신의 대표적인
주먹밥 만들기 체험도 함께 진행하면 좋으련만!
소수의 인원들과 함께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대부분 어머니들이 1980년대 당시 30대이셨으니..
40년이 5.18민중항쟁에 세월이 훌쩍 지나
어머니들의 평균 연령이 벌써 70~80대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연로하신분들이나, 코로나 관련으로
많이들 못나오고 계신다는게 안타까웠어요.
오월어머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오월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월어머니들과 함께 몇가지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Q.오월어머니집을 소개해주세요!
A.
본인이 구속되거나 부상당하거나
남편이, 자식, 오빠, 동생들이 구속되거나, 부상당하거나 그런 여성 어머니들로 구성이 돼 있습니다.
80년 5월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때는 아무도 없었잖아요.
우리들끼리 서로의 위안을 받고 위안을 해주면서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쉼터라고 생각하면 될 거예요.
우리 어머니들이 여기 오셔서. 서로 이야기 나누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안아주고 그런 곳입니다.
이제 트라우마를 이겨내셔야 되니까
저희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건강복지사업)
언제든지 누구라도 여기 어머니 집을 오셔서
이야기 나누면서 적지만 담소하는
편안한 어머니집으로 다녀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들이 5.18민중항쟁 41년이 되도록
투쟁 현장에서 80년대부터 끊임없이 쉬지 않고.
그 중심에 계속 하셨던 분들이 우리 어머님들이세요.
한복 입고, 소복 입고 나오시고
뭐 들고 차에 뛰어들고 전도하려고
막 이러신 분들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직도 싸우는 중이에요.
Q.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지를 보내셨습니다.
이런 활동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싶어요.
A.
우리 어머니들은 항상 앞장서서
먼저 성명도 내고 참여도 하고 그렇습니다.
먼저 관장님께서 제안을 해주셔서
우리 어머니들이 흔쾌히 모금을 했어요.
1차로 백만원을 전달했고 (미얀마 유학생에게 성금 전달)
신광중,각화중 학생들과
바자회를 하여 모금 하였어요.
미얀마를 볼 때 우리 80년대를 보는 것 같아요.
미얀마는 전세계적으로 언론이 다 통하지만
우리 80년대는 고립된 상황이었어요.
그런 아픔이 우리 미얀마 가족들한테
우리 어머니들이 힘을 좀 줘야 되지 않냐.
가지는 못할 망정.
2014년 12월경, 저희가 미얀마를 다녀왔어요.
8888항쟁 가족들을 만나서,
서로 위로를 하고 했는데
이번에도 정말 갈 수만 있다면.
가서 우리가 같이 싸워주고 힘이라도 실어주자.
우리 어머니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갈 수가 있겠나요.
여기서 우리가 힘을 보태주자!라고 생각이 모였어요.
그래서 저희가 기자회견과 모금활동을 하고
연대하는 입장으로 보여줄 수 있는것을 고민했어요.
이번에 미얀마에서 많은 희생자들이 생겼잖아요.
국가 폭력에 의해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하얀 소복을 입고 기자회견을 나갔습니다.
그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주고 다친 희생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소복을 입고 가서 힘을 모은 거죠.
Q.
5.18 민중항쟁이 40년이 넘었어도,
왜곡이 심하고, 고립된 날들이었잖아요.
1980년 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어머님들도 좀 뭉칠 수 있는
결집력이라고 해야 될까요?
지금까지 이렇게 지속될 수 있는 힘이 어떤걸까요?
A.
억압을 받으니까 같이 뭉쳐지는 거예요.
조금 편안해지면 흩어지잖아요.
80년 5월에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서로 한 가족이 된거죠.
그래서 지금까지 오는 거예요.
사실은 그때 어려움을 당하고 아주 다 배척했어요.
일부 시민들 친척까지도 우리를 만나면
다 잡혀가거나 사단이 나니까
오로지 뭉친것은 우리 가족들뿐이었어요.
이렇게 우리 피해자 가족들이 똘똘 뭉쳐진 게.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는 거죠
똑같은 국가폭력이라는 공통점이 있죠. 억울하니까.
친척들도 사실 우리를 등돌렸어.
왜냐하면 알면 다 잡혀서,
그때는 뭐 죄 있어서 잡혀간 게 아니야.
그래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실로만 그 자체로
(가족이 희생당한 사실)
다 잡아가고 군부독재 그 기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끼리라도 뭉쳐서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 되니까
우리들끼리 똘똘 뭉쳐야 해..
그때 힘이 결집이 되는 거죠.
자식잃은 엄마들이 눈에 보이는 게 있었겠어요.
속된 말로 너무 억울하잖아요.
우리 어머니들 소원이 살아생전에
전두환이 벌받는 건 보고 죽어야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5.18은 끝난 게 아니라
계속 진행 중인거에요.
Q. 요즘 사람들이 5.18에대해서
어떻게 바라봤으면 좋을지 말씀부탁드립니다.
A.
5월, 당시 있는 그대로만 받았들였으면 좋겠어요.
폄훼하지않고, 왜곡하지않고.
41년이 지났지만 무려 80년 당시
5일 만에 항쟁 기간 동안에 있었던 그 상황 그대로
우리가 지금 계승을 하려고 그 대동정신을
후손들에게 알리고 전달하는 게 가장 크거든요.
같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폄훼하고 왜곡한다는 것 자체가 속상해요.
"당신들 그 때 가족 안 죽었잖아, 안잡혀갔잖아"
경험이라고는 해보지도 않았거든요.
당시 상황 그대로만 봐주라고 말이야.
우리 살아온 삶 자체가 고통의 삶 속에 살았고
어린 나이에 아버지 잃고, 남편잃고, 자식잃고
평생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있어요.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고생하고 있었는데
자기들은 그런 삶을 살지 않았으면서
헛소리 하는 사람들 보면 진짜 한 대 때려주고 싶지.
그래서 5.18을 정말 있는 그대로 봐주고
해석해주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들의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마음 아팠습니다.
친척들도 희생자 가족들을 등돌렸던
그 사실을 몰랐었거든요.
억울해서, 억압을 받아서,
뭉쳐질 수 밖에 없었던
희생자 유가족들의 결집력이
40년이 지난 지금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고있는
역사의 산 증인이 되고있는 어머니들이셨습니다.
이런 사랑해보셨나요?
이향란 이사님의 1980년대 성춘향 이야기
아래 사진속, 왼쪽에 계신 카키색옷을 입으신
"이향란 이사"의 1980년대의 성춘향 러브스토리입니다.
"나는 나의 고통 많이 심한 줄 알았는데
와서 뭐 한 사람 한 사람 말 들어보니까
너무너무 부끄러울 정도예요. "
오월어머니집, 이향란 이사
그때 당시 약혼을했던 신랑이 12년형을 받았어요.
약혼을했어도 절대 면회가 안되어서
혼인신고를 먼저 해야 면회를 할 수 있었답니다.
그때당시 남편이 평범한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방식이 아니라, 진취적이고 여러 사람이
함께 더불어서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했어요.
12년이 아니라, 20년이되더라도
옥바라지할 마음으로 혼인신고를 했어요.
혼인신고에 필요한 도장을 찾기위해
친정아버지 도장을 몰래 가져왔어요.
그리고 직장 상사 세 분한테 동의를 구했어요.
혼인신고를 하려면 동의를 받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거기서 인정을 해줘서
혼인신고를 겨우해서 면회를 갈 수 있었답니다.
차 한잔 마시면서, 다과를 먹으면서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더라구요.
1층만 있는게 아니라 2층에도
어머니들의 쉼터같은 공간을
한 번 둘러보기로 했어요!
사무처장님께서 2층안내도 해주셨답니다.
2층으로 된 건물이지만, 연로하신 어머님들의
건강을 위해서 엘리베이터가 내부에 있어요.
2층에는 어머니들이 건강복지사업의 일환으로
노래교실, 요가교실, 공예교실 등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는데 어머니들의
그림과 작품들을 볼 수 있었어요.
미술창작활동을 통해 작년에 전시회도 하였는데
어머니집에 방문하시면 편하게 작품들을
둘러보실 수 있답니다.
오월의 아픔을 토해내며, 그림을 그리며
헌신하고 아픈 작품만이 아닌
어머니들의 내면 속 어린시절을 찾아가는
작업을 선사하는 프로젝트였다고 해요.
2층 베란다에는 텃밭도 있어서
여기서 재배한 채소들로 식사도 한다고 합니다.
2층에는 어머니들 쉼터로 치유실과
관련서적들이 있는 공간도 있었어요!
작년에 진행된 전시인
"내 안의 그녀 - 오월 꽃이 화알짝 피었습니다"
라는 주제로 전시되었던 작품들도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 켠켠이 마련되어있는데
사무총장님의 설명을 듣는데
저는 여기서 눈물이 콸콸쏟아졌지 뭐에요..ㅠ
아픈 기억이라고해서 그림들이
다 어둡고 칙칙한게아니라
다 밝은 그림체들이에요.
어린시절 어머니들의 꿈많았던 소녀시절 이야기,
젊은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로
작품 하나하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답니다.
5.18민중항쟁으로 희생된 젊은시절의 남편과
다시한 번 산책하고싶은 마음을 그린
어머니의 작품..
젊은시절 희생한 남편과
젊었던 그때로, 다시 한 번 남편과 만나고 싶은
그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서 저는 이 작품에서
눈물이 나더라구요.
자식잃은 어머니의 작품에서는
아픔없는 곳으로 훨훨 날아가길 바라는 의미로
한마리의 새를 표현한 작품도 있었구요.
어머니들의 상처와 애환을
내면 속 작품으로 치유되었던 시간들이었다고해요.
다음세대로서의 저는 이 작품들을 보면서
잊지말아야할 역사, 오월정신을 계승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답니다.
바깥까지 마중해주신 어머니들의
따뜻한 인사에 뭉클했던
오월어머니집 방문기었습니다.
같은 광주에 있더라도
저 역시도 이 공간을 처음왔어서
부끄럽기도 했는데
가족들과 5월이 5.18민중항쟁을 기억하기 위해서
또 방문해야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 5.18의 정신이 민주화운동에
굉장히 큰 역할이었다고 보거든요
진상규명이나 명예회복이 아직도 멀었잖아요.
어머니들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꼭 모든 것들이 해결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저희 어머니들의 바램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가족의 일원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주체적 활동을 하고있는
오월어머니집의 어머니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되지않는다.
40년간의 억압과 왜곡속에서도
"진실"하나로 뭉쳐졌떤 오월어머니들.
다음 세대의 일원으로써
그 날을 잊지않도록, 그 역사가 계승되도록
굳건하게 마음먹었던 오월어머니집 방문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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