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들2기] 518민주화운동 사건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페이지 정보
본문
518민주화운동 사건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안녕하세요
올해 오월이들의 서포터즈로 간택된 뉴하랍니다
광주의 토박이로서 항상 오월이 되면 이 뜻깊은 달을
되새기곤 한답니다
올해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지난달부터 시작된
오월이들의 활동을 시작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알릴수 있는 계기가 되어 참 기쁘더라구요
이번에 들려드릴 컨텐츠는 사건의 시작으로부터
지금까지 !
올해 41주년이 되었는데요
최근에 미얀마 쿠테타로 인해 광주에서도
다시금 새뇌기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도 해요
최근에는 자선모금까지 할정도로 광주의 힘이
부디 간절한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인데요
하루빨리 무사하기를 기원하며 , 41년전을 거슬러
광주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까해요
광주 5.18자유공원
주소 : 광주 광역시 서구 상무민주로 61
입장료 무료
☎062-376-5197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상무지구 자유공원에 찾아갔답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흔적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요
그때 그 당시의 공포감과 위압감, 그리고 간절함까지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곳이자 그 당시에
많은 학생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거짓자백을 만들게
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거슬러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
약 10일간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군사독재와
통치를 반대하고, 계엄령 철폐, 민주정치 지도자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벌인 민주화운동
518자유공원의 전시실에서는 그 당시 그곳에
직접 있었던분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던곳이기도 한데요
10일간의 항쟁끝에 비로서 이곳에 있는 나
그리고 광주, 전라남도 시민분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 라는 문구가
머릿속에 깊숙히 박히더라구요
사건의 개요가 되었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비서인 김재규에 의해 시해됨으로써
박정희의 정권이 막을 내리고 대통령 대행체제가
이어졌는데요
이러한 불안한 정국을 틈타 신군부세력인 전두환,
노태우 등 제 2군사들이 쿠테타를 일으켰는데요
무력으로 순식간에 군부와 정치권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군사통치 시대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여
국민은 불만은 국도에 달했였으며, 이는 적국적으로
저항 운동이 지속, 확산되었는데요
이러한 경계가 시작되자 서울에서는 서울역에 모여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벌였으며 이 비상계엄령을
전국 확대를 의결하였답니다
때문에 5월 18일 비상계엄군은 전라남도 광주의 각
대학을 장학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저지하였는데요
왜 대학교였느냐 ?
그때 당시 시위가 열리면 암묵적으로 약속했던게
'대학교에서 뭉치자' 라는게 전국적으로 퍼지며
아마 가장 먼저 노렸을 장소가 아닐까 싶어요
이에 울분한 학생들은 비상계엄령군간의 충동이
일어나고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한 학생들이 속출하자
광주의 중심대로인 금남로로 진출하였답니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학생시위대를 지지하는
일반시민들도 구타하고 체포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부상자와 연행자들이 발생하였답니다
다음날 계엄군의 폭력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학생들의 시위에 동조하며 금남로로 모여들었으며
계엄군과 시민간의 공방전을 주고 받으며
시위는 점점 절정으로 치솟았는데요
이때 노동청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며 경찰 4명이 사망하였으며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하였답니다
이후 도지사와 협상을 벌였으나 퇴각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그대로 결렬 ..
이후 이어진 무차별 집단발포로 인한 사상자 및
부상자들이 속출하였으며 이 집단발포 이후 시위대는
계엄군의 폭력에 맞서기위해 나주, 화순 등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을 합니다
1980년 5월 21일 결국 무력항쟁으로 변하고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더니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가 시작합니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그 광주시민들은
누군가의 가족이였고 이웃이었습니다
평범한 시민이었고 학생이었습니다
목슴을 걸고 수십명이 피를 흘리고 쓰러졌고
시민들도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싸웠답니다
그 당시 시민들은 시민군을 위해 대야에 주먹밥을
만들어 날랐으며 전남대병원 등 의료진들은 목숨을
걸고 시민들을 치료하기 급급했어요
밤낮 상관없이 그저 야전병원이였지요
그 당시 수술에 필요한 혈액이 부족하여 가두방송을
보냈는데, 이태까지 그렇게 혈액이 넘친적이 없다고
해요
모두가 같은마음 같은뜻이 아니였을까 싶어요
당시 시외전화와 광주곳곳을 막아놓았기에 뉴스에
이 사건이 방송되지는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상황을 고스란히 전했었고 계엄군이 오늘밤
침공할 가능석이 크다하여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귀가시켰고 시내버스는 일체 두절 ..
5월 27일 마지막 날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은 시내로 진입하고, 가두방송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하는데요
도청 안 시민군에게 무차별 사격이 시작되었고
도청과 시내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진압작전이
종료되었답니다
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광주를 지키고자 나오지말라며
이 소식을 부디 널리 알려달라며 사명을 다해 맞써
싸운결과 지금 우리가 있는거겠죠
이렇게 끝이 난 10일간의 사투
진상을 알리는 학생들의 5월 투쟁이 시작되었으며
거짓자백을 요구하고자 강압하고 폭행하고 억압했던
광주 자유공원의 흔적은 그대로 증명하고 있었답니다
자리를 옮겨 518민주화운동에 광주시민군을
추모하기 위해 518기념공원에 방문하였답니다
'아! 광주여 영원히 빛이어라!'
라는 주제로 지상의 518민주화운동 현황조각공간과
지하의 추모승화공간 나누어 조성되었는데요
민주화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조각으로 형상화함으로
역사속에 길이 빛이고, 이곳을 찾는 모든분들에게
민주정신을 함양하는 역사의 신교육장으로
삼고자 만들어졌답니다
정면으로 보이는 자상인물상
518참개했던들의 용기와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였으며, 주변에 높이 솟아있는 스테인레스
조형물은 정의가 하늘로 솟고 내일을 향한 소망이
간절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위에서
보았을때 태극모양으로 세워놓았다고 해요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이름들이 적혀져 있는
패를 볼 수 있는데요
이게 바로 518 관련자 명단이랍니다
피해자로 인정되어 명예회복과 보상을 받은자분들의
명단이라고 해요
현재 1심선고에서는 전두환의 거짓말과 당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헬기사격은 없었다며 공소사실을
부인해왔는데요
이 많은 진실들이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사과 한번
없이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 ..
너무 화가 치밀어 오르더라구요
하루 빨리 이 모든 사실과 죄를 인정하고
부디 광주 시민군들에게 조그만한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518의 오월이들의 진실은
계속 될것입니다
- 이전글[오월이들2기] 41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총감독님 인터뷰 다녀오다! 21.04.12
- 다음글[오월이들2기] 41주년 5.18광주민중항쟁 행사위원회 상임행사위원장 인터뷰 21.04.07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