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들 3기] 5·18 민주화 운동 기념 연극 -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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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Banff입니다 :)
5월 28일, 광주광역시 서구의 소극장에서 그림자 인형극이 열렸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의 참상을 그려냈다고 하는데요.
광주 시민을 상대로 벌어진 잔혹한 학살 현장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겠습니다.
먼저 <그때 그 사람들>의 연극이 펼쳐졌던 장소에 대해 알아볼까요?
광주광역시 서구에는 광주천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천변좌로 12-16 청춘빌리지의 발산마을입니다.

뽕뽕브릿지는 광주 발산마을의 작은 공유 공간입니다.
2015년 일반 가정집을 개조하여 만들어진 이후 개관전을 시작으로 다양한 전시가 열렸습니다.
작년에는 1층과 2층의 전시장을 분리하여 환경에 대한 상반된 시선을 드러낸 김은경 작가의 개인전 <그것은 한낱 상상에 불과하다>이 개최되기도 했습니다.

뽕뽕브릿지는 과거 전방주식회사의 여공들이 공장을 오가던 뽕뽕다리에서 가져온 이름입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광주천 일대에는 뽕뽕다리가 여러 개 세워져 있었습니다.
구멍이 뽕뽕 뚫린 공사장 안전 발판용 철판을 이어 붙인 다리여서 뽕뽕다리였습니다.
마지막 뽕뽕다리는 1986년 인근에 방림교가 들어서면서 철거됐습니다.

뽕뽕브릿지는 마을과 마을을 잇던 뽕뽕다리처럼 예술과 마을을 잇는 매개체가 되겠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본래 발산마을은 1980년대 광주에서도 알아주는 달동네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서구의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한껏 다채로운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었고,
공공 미술 프로젝트를 시작함으로써 기울어져 가던 달동네에 청춘이라는 새로운 옷을 입혔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는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했던 예술인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의 이야기



원래 전시회 위주로 돌아가는 곳이었는데 이번에만 예외적으로 연극을 준비하셨다고 해요.
다들 연기를 너무 잘하셔서 연극이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 실제로 섭외된 배우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이름 검색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봤었는데 한 분은 영화배우 겸 감독님이었다니????
추말숙 배우님 말을 정말 재밌게 하시던데 나중에 연기든 연출이든 큰 영화제에서 뵈었으면 좋겠어요.


<그때 그 사람들>에는 자꼬할머니와 금이, 청년 그리고 청년의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자꾸를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는데 자꼬가 자꾸의 전라도 방언이라고 하네요.
이름이 자꼬할머니가 된 것도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해서였어요.
오지랖이 넓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도맡아하는 캐릭터의 특성이 반영된 명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꾸준히 사람을 이어 주고 관심을 가진다는 긍정적인 의미의 오지라퍼입니다.

자꼬할머니는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구석에서 울고 있던 한 여자아이를 발견합니다.
금이를 달래기 위해 보따리에서 코코몽 인형을 꺼내보지만 울음은 그칠 기미가 없었는데요.
사실 금이에게는 슬픈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느 따스한 봄날이었어. 그 다음날이 내 소풍 날이었지. 엄마가 소풍 갈 때 입을 새 옷을 사 주신다고 해서 엄마 손을 잡고 큰 길로 걸어가고 있었어.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총성) 신발을 주으러 가다가 엄마 손을 놓치고 말았어. 그 뒤로는 다시 엄마를 만날 수 없었어.
수차례의 총성이 울리고 아수라장이 된 광주시장
금이는 급하게 도망을 치다가 신발을 잃어버리고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손까지 놓치고 맙니다.
자꼬할머니는 금이를 안쓰러이 여기고 신발을 찾아줄 것을 약속하죠.


자꼬할머니는 금방 보따리에서 금이의 신발을 꺼내줍니다.
마냥 도라에몽 주머니 같았던 보따리에서 다양한 물건이 나오는 것을 보고 이곳이 사후세계임을 짐작했습니다.
금이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시민들 중 하나였던 것이죠.
자꼬할머니가 보따리를 안고 다니는 이유 역시 희생자들의 비애를 어루만지기 위함이었던 것 같아요.
금이는 신발을 신고 마침내 어머니를 만납니다.
금이는 2인 1역(어머니를 만나기 전, 어머니를 만난 후)으로 각각 다른 배우가 연기했습니다.


그 시각 청년은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전해 듣고 계엄군에 맞서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청년은 아버지에게 광주로 내려가야겠다고 어렵사리 말문을 열고,
청년의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며 청년을 배웅합니다.
만약 광주의 참상이 타지에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어도 쉽게 청년을 보내줄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아무래도 오늘 밤이 우리의 마지막 밤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죽음으로 민주와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사실 청년의 정체는 고 윤상원 열사였습니다.
윤상원 열사는 5월 27일 새벽 최후 항전지 옛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그의 나이 향년 31세였습니다.

내가 죽었나요?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는데…….
고 윤상원 열사는 자꼬할머니를 마주하고 나서야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쉽사리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는 말에서는 항쟁에 대한 굳은 의지까지 느껴졌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
연극이 거의 마무리되어 갈 때 즈음 다 같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1년 고 윤상원 열사와 고 박기순 열사의 영혼 결혼식에 헌정된 곡입니다.
소설가 황석영이 사회운동가 백기완의 옥중지 <묏비나리> 일부를 차용하여 작사했고, 전남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종률 학생이 작곡했습니다.


연극은 5·18 최후 항전 사망자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막이 내려가면서도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는데 아무래도 다들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배우 분들도 눈물을 글썽이시는데 저도 덩달아 울컥하더라고요.
그동안 연극을 준비하시면서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지????

퇴장할 때 극단에서 선물을 나눠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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