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이들 3기] 5.18 민주화운동의 사건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소개합니다.
페이지 정보
본문
"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 우리는 거리의 광장에 모였다. 그게 바로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이다. "
사건의 배경과 진행과정
1979년 10월 20일, 16년 동안 독재정치를 해오던 박정희가 사망한 뒤 제주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1980년 5월 18일 자정을 기해 전국으로 확대된다. 그사이 전두환을 필두로 하는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통해 이미 군권을 장악해버렸다 계엄지역을 확대한 이유는 국민들의 타오르는 민주화의 희망을 짓밟고 12.12 군사 반란으로 시작된 자신들의 정권 찬탈 계획의 저항을 미리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1980년 정문 앞에서 학생들과 전경들이 대치하고 1980년 5월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정문 앞 충돌에서 5.18이 시작되었다. 공수 부원들은 학생들을 쫓았고 닥치는 대로 진압봉으로 때리며 군홧발로 밟았다.
학생들은 무자비한 계엄군의 만행을 알려야만 했고 사람들이 많은 도심으로 향했다. 광주역 광장에서 대열을 가다듬고 광주시의 중심가인 금남로로 나간것이다
흩어졌다 모이기를 되풀이하면서 끈질기게 시위했지만 공수부대를 제외하고 경찰만으로도 학생들의 시위를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공수부대를 광주 도심에 투입하였고 상황은 끔찍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시민이 조금씩이라도 모여있으면 진압봉을 휘둘렸다. 일반 진압봉보다 압도적으로 큰 철제 곤봉으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상식 밖의 행동들은 시민들을 분노에 휩싸이게 했다.
시민들은 금남로에 자꾸만 모여들었다. 결국 중.고등학교에도 휴교 조치가 내려졌고 버스터미널에서는 계엄군에게 대검에 찔려 죽은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민들은 이런 행위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광주시민들의 눈빛은 예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광주 시민들은 죽음을 불사하더라도 계엄군의 폭력과 맞서 싸우기로 결단했다. 자녀들을 못 나가게 했던 장년층마저 거리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은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 회사원, 가정주부, 학생까지 거리는 어느새 가득 찼고 시민들은 태극기를 흔들었다. 총과 대검에 맞서기 위해 기껏해야 집에서 가져온 식칼과 각목이 다였다고 한다. 무등경기장 앞에서부터 200여 대의 택시들도 도청을 향했으며 버스도 합세하였다.
공수부대가 달라진 시민들의 기세에 눌려 바리케이드를 쌓았지만 다시 공수부대의 최루탄이 날아왔다. 수많은 시민들이 다치고 잡혀갔다.
19일에는 발포가 있었다. 조직적이고 치밀한 발포는 5월 20일 밤에 이뤄졌다고한다. 광주역은 그들에게 병력과 보급 수송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곳이었다. 도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여졌고 뒤이어 총이 발포되었다.
계엄군은 광주시를 봉쇄하였고 광주로 들어오는 버스나 열차도 끊었다. 계엄당국의 보도 통제로 인해 기사조차 나지 못하고 신문 발행도 중단되었다. "육지 속의 섬처럼 고립되고 만 것이다"
시민들은 이러한 상황들을 올바르게 전하지 않고 왜곡 보도하는 방송국을 불태우고 광주 경찰서와 서부 경찰서를 점거했다. 어두운밤을 시위대가 밝히며 투쟁을 계속 해나갔다.
21일 오후 1시에 도청 옥상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일제히 사격이 시작됐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며 시민들이 하나둘씩 쓰려져갔다. 건물 옥상에서도 저격수들이 조준사격을 하였다
집단 사격에 저항하기 위해 시민들도 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 택시 운전사의 실제 주인공인 위르겐 힌츠페터는 다음과 같이 당시 참상을 알렸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필름에 담았다. 내 생애에서 한 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종군기자로도 활동했던 그가 남긴 글이었다.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에서 너무나 처절하게 맞서 싸웠던 광주 시민들. 시민 군들에게 더이상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5월 26일 항쟁 지도부는 마지막 날 계엄군의 진입이 예상되는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윤상원은 도청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외신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리고 시민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윤상원이 원한 건 피를 흘리지 않는 수습과 해결이었다. 그는 죽음을 자각하면서도 끝까지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또다시 시내로 진입한 계엄군은 새벽 4시 10문 도청 뒷담을 넘었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끝까지 도청을 지켰던 시민 군은 꽃잎이 떨어지듯 져버렸다.
42년이 지난 2022년 현재, 도청 시계탑에서는 오후 5시 18분이 되면 님을 위한 행진곡이 흘러나온다.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귀 기울이고 생각할 수 있었다. 군부 쿠데타에 맞서 싸운 시민들은 우리들의 평범한 삶을 어떻게 지켜 될 수 있는지 고민했고 광주시민들은 피를 나누며 주먹밥을 만들어 나누는 대동세상을 이뤄냈다.
5.18 민중항쟁은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민주화 운동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날 피 흘려 죽은 고귀한 희생을 잊을 수 없다 억압과 불의에 맞서 싸운 5.18민주화운동은 끝까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워야 한다.
- 이전글[오월이들 3기] 518민중항쟁 그날의 진실, 사건 배경 및 발포 타임라인 22.04.20
- 다음글[오월이들 3기] 518민중항쟁 행사위 온라인홍보단 오월이들 활동을 시작하다 22.04.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