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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들 3기] 518민중항쟁 그날의 진실, 사건 배경 및 발포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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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222-04-20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255

본문




누군가에겐 감추고 싶은 역사

민주화의 씨앗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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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1980년 5월의 광주를 담은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면, 잊지 못할 대사가 아닐까 싶다. 계엄군의 손에 처절하게 스러져간 시민들의 피로 물든 거리에서 여주인공 이요원은 확성기를 통해 외치고 또 외친다.

실제 5.18민중항쟁 과정에서 가두방송을 하던 당시 22살의 여대생이었던 박영순 씨가 전남도청 1층 방송실에서 한밤중 적막을 가르며 외쳤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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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에 가려 진실이 묻혀서는 안 된다. 가해자는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떳떳하게 사는데, 그 고통을 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온전히 안고 살아야 하는가.

온전히 진실을 마주하는 것 역시 용기다. 아픈 역사를 거듭 언급하며 되새기는 것은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오늘은 518민중항쟁의 진실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518민중항쟁 사건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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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광주의 끔찍한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前 대통령 사망 이후, 유신독재 정권의 수혜자였던 전두환, 노태우를 위시한 신군부집단이 12.12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하고 정권 탈취의 야욕을 드러내며 시작된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에 따라 취해진 계엄군의 유혈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들과 학생들은 계엄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항거했다.









계엄군의 발포 타임라인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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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학교 학생과 계엄군 대치 상황 


1980년 5월 17일 밤, 전남대에 진주한 계엄군은 도서관 등에서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불법 구금하였다. 다음 날인 5월 18일 아침 학교에 등교하거나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항의하기 위해 정문 앞에 모인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강제해산시켰다. 이에 학생들이 항의하면서 항쟁의 불씨가 되었다.

· 오후 1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노태우, 정호용 등과 이날 오후 육군회관에서 회동하여, 광주 시위를 방치하면 계업확대 의미가 없어진다고 판단한다.

· 오후 3시 30분

특전사령관 정호용은 11공수여단장 최웅을 광주로 내려보낸다.



1980년 5월 19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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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광주관광호텔 앞 대치 상황 


· 오후 4시

보안사에서 파견한 기획조정처장 준장 최예섭, 송정리 비행장 도착, 광주지구 505보안부대장 대령 이재우 옆방에 머물며 전교사 작전 회의에 참여한다.

이들은 27일 진압작전 때까지 광주에 체류하고,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을 통해 시민과의 협상에 개입, 보안사령부에 상황을 직접 보고한다.

최초발포

· 오후 4시 50분

시위 진압차 출동한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장갑차가 계림동 광주고교 부근(250-91번지)에서 시위대에 포위되어 공격을 당하자 안에 타고 있던 차 아무개 대위가 해치를 열고 M16을 난사, 고교생 1명(김영찬), 초등학생 2명, 중학생 2명이 중상을 입는다.




1980년 5월 20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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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8시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 지시로 1군단 보안부대장 홍성률이 광주에 도착한다. 오전 9시 30분 광주시내 잠입해 상황을 파악하고, 21일 이후 시내에 은신하여 시위대 위치 및 무장 상황 파악을 보고한다.

· 정오 12시

특전사령관 정호용이 광주에 도착한다. 전교사 상황실에 설치된 7공수여단 지휘부를 격려하고, 전교사사령관 윤흥정 면담 후 오후 귀경한다.

· 오후 4시 45분

전두환 계엄사령관 이희성을 찾아가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을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시키는 방법으로 경질해 줄 것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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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 


광주역 발포

· 시각 미상 (20일 자정 직전)

"대대장들의 요청에 따라 서울에서 가져간 실탄으로 사격했고, 그 과정에서 4-5명의 사상자가 났는데, 실탄의 분배와 사격 지시는 내가(3공수여단장 최세창) 내린 것이다."

_5.18사건 25차 공판진술(1996.7.29.)

3공수여단장 최세창은 서울지검 진술(1994.12.24.)에서는 5월 20일 자정 무렵의 광주역 발포 사실을 부인했다.

· 오후 11시 20분

2군 사령부는 "5월 20일 23시 20분 실탄 통제 발포 금지" 지시를 하달한다.

· 자정 12시

광주역에서 3공수 12대대와 15대대 발포가 자행된다. 실제 발포는 20일 밤 22시 30분경부터 있었다 기록됨.

· 시각 미상

광주역 일대에서 김재화(25), 김만두(44), 김재수(25), 이북일(28)이 계엄군의 총상으로 사망한다. 최영철(39), (김명환(16), 나순돈(20), 강인곤(20), 정현택(24) 및 아무개 1명이 총상을 입는다.



1980년 5월 21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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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로 대치 상황 


· 오전 4시 30분

계엄사령부는 이희성 주재로 열린 계엄사 대책회의에서 자위권을 발동키로 결정한다. 아울러 광주 외곽으로 계엄군 전환배치, 1개 연대 추가 투입, 폭도 소탕 작전은 5월 23일 이후 명령에 따라 실시키로 결정한다.

· 시각 미상

501 정보여단 군사정보관 김용장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이날 오전, 헬기로 광주비행장에 도착해서 특전사령관 정호용, 505보안부대장 및 성명 미상 1인 등과 만나고 서울로 돌아간 뒤 폭도들에 대한 사살 명령이 떨어졌다."

_ 2019년 3월 김용장 증언 보도

공군 706보안부대장 운전병 오원기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용산 미8군 헬기장에서 UH-1N 귀빈용 진청색 헬기를 타고 광주로 떠나는 것을 목격했다."

_ 공군 706보안부대장 운전병의 증언

* 김용장과 오원기의 증언은 5.21발포 당일 전두환이 행적을 알려주는 중요한 제보로서, 국가차원의 조사에서 공인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 오전 4시 35분

국방장관실에서 국방장관 주영복, 계엄사령관 이희성, 합참의장 류병현 등이 참석한 가운데 '폭도소탕계획'을 23일 이후 명령에 따라 실행하기로 결정한다.

· 오전 8시

진돗개 하나(최고수준의 경계 태세)를 발령하고, 8시 35분 탄약 수송차량 출발, 10시 12분 탄약 수송차량 복귀, 11시 분배 완료한다.

· 시각 미상

2군사령관 진종채 헬기로 상경해 계엄사령관에게 소탕 계획을 건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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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전남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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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탑



· 시각 미상

계엄사령관 이희성

"도청이건 어디든 군인이 가서 보초를 서는데 총기를 뺏거나 생명을 위협할 때는 군인복무규율에 의해 초병이 정당방위 지위권을 자동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광주의 상황이 그러한 정도라면 위의 경우가 적용되기 때문에 여기서 자위권 행사에 대해서 특별히 의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_1996년 7월 29일 5.18 사건 25차 공판 진술

계엄사령관 이희성에 발언에 대해 거기 있는 모두가 동의했다. 그리하여 계엄군의 지위원 행사 문제는 자동으로 결정됐다.

· 시각 미상

국방부 장관실에 국방장관 주영복,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보안사령관 전두환, 수경사령관 노태우, 특전사령관 정호용, 육사교장 차규헌이 참석한다. 이때 국방장관실에서 열린 회의 시각은 밝혀져 있지 않지만, 「광주충정작전간 2군 지시 및 조치사항」의 5월 20일자 23시 20분 기록의 여백에 손글씨로 쓴 것이 남아 있다.

· 오전 11시

11공수여단 63대대장, 대대장 지프에 보관한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1인당 10발씩 지급하고,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 시에만 사용토록 지시한다.

육군작전참모부장 김재명이 특명단장 자격으로 21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헬기 편으로 광주를 방문, 전교사령관 특전사령관, 공수부대 3개 여단장, 20사단장, 보안사 기획조정처장 외쳬섭 등과 면담하고 상경 후 육본에 조기평정책을 건의한다.

· 오전 11시 46분

31사단 교도소 경계병력에 실탄 2만발을 공수한다.

· 정오 12시

2군사령관 진종채

"자위권은 5월 21일 정오에 발동하라고 계엄사령관이 지시했다."

_서울지검 피의자 신문조서(199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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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앞 집단발포

· 오후 1시

시위대의 버스와 트럭이 돌진해오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발포, 버스 운전자 사망하다. 오후 1시 30분 돌진해오는 장갑차에 공수부대가 일제히 발포, 장갑차에 탄 청년이 피격된다.

조영준(가명) 하사

"사격능력이 뛰어난 저격수들이 시위대와 맞선 대치선에서 사격했으며, 일부는 옥상에 올라가 사격했다."

_광주일보 1995년 12월 5일 자 보도

7공수여단장 준장 신우식

"우리는 광주로 출동할 때부터 실탄을 가지고 갔다. 7공수여단 소속 2개 대대가 휴대한 실탄은 대대마다 각각 M16탄은 24,600발씩, M60탄은 3,200발씩 있었다."

_서울지검 피의자 신문조서(199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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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피터슨이 찍은 500MD 공격헬기와 UH-1H 기동헬기

이들 사진은 조비오 신부 증언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광주천 인근 헬기사격(헬기발포)

· 오후 1시 30분-2시

조비오 신부 헬기사격을 목격한다.

"5월 21일 1시에서 1시 30분 사이, 호남동 성당 정문을 나서는데, 헬기가 도청 쪽에서 날아와 불로교 상공에서 (사격하여) 지축을 울리는 기관총 소리가 드드드드득 세 번 울리고 동시에 불이 픽 나갔다."

_제145회 국회회의록(1989.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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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천 


· 오후 2시 50분

공수부대는 도청, 전일빌딩, 수협도지부, 상무관 옥상 등에서 도청으로 접근하는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다.

· 오후 4시

진돗개 둘(강화된 경계태세)를 발령한다. 공수부대 2개 여단 작전 통제권, 31사단에서 전교사로 이동한다.

· 오후 4시 30분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요구에 따라 체신부 장관으로 윤흥정을 추천한다. 육군 종합행정 학교장 소준열을 오후 4시 30분경 전교사에 도착, 후임 전교사령관으로 부임한다. (5월 22일 10시 정식 취임)

· 오후 6시

7공수여단장 준장 신우식은 상부로부터 '방어를 위한 발포 가능' 지시를 수령한다.

· 오후 7시 30분

계엄사령관 이희성, 생방송으로 자위권을 천명한다.

계엄사 보도처장 박영록

"5월 21일 오후 7시 30분에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발표한 자위권 보유 천명 담화문은 이 사령관이 외부에서 가져와 메모를 정리해 그대로 읽은 것이고, 예정에 없던 텔레비전 생중계는 21일 오후 3시께 어디선가 전화를 받고 나서 급히 결정된 것이다."

_5.18사건 항소심 4차 공판진술(1996.10.21)

· 오후 8시 30분

육군본부 2군 사령부와 전교사를 거쳐 광주 외곽 계엄군들에게 자위권을 발동 하달, 탄약을 분배한다.

· 오후 8시 50분

자위권 행사 지시를 수령하고 실탄을 분배한다.

· 오후 9시

전교사 작전회의에서 자위권 발동을 지시한다. 지침에 '경고하라, 접근하지 말라, 접근하면 하복부 지향 발포 허용.'

· 시각 미상

주남마을 앞 총격 및 무단 처형, 계엄군은 광주 화순간 도로 차단 중 주남마을 앞에서 통과하는 버스에 총격을 가해 탑승한 시위대 15명이 즉사한다. 살아남은 중상자 2명을 손수레에 싣고 산으로 데려가 무단 살해한다.



1980년 5월 24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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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1시 30분

11공수여단이 주남마을에서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하던 중 광주대 인근 송암동에 이르러 매복 중인 교도대의 공격을 받고 9명이 사망한다. 11공수여단 장병들은 송암마을 주민에 대해 화풀이 총격을 가하고 무단 살해를 저지른다.

이때 103항공대장은 11공수여단장으로부터 요청을 받아 무장헬기로 출동했으나, 아군으로 파악되어 사격하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1980년 5월 25일 일요일 

· 오후 11시 10분-12시

계엄사령관실에 보안사령관 전두환, 수경사령관 노태우, 계엄사령관 이희성, 육군참모차장 황영시 등이 모여, 광주 소탕 작전을 최종 점검한다. 27일 00시 01분 이후 전교사령관의 판단 아래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1980년 5월 27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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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4시

상무충정작전

: 도청, YWCA, 전일빌딩, 관광호텔 점령 특공 작전.

대법원은 이 작전이 발포 명령을 포함하고 있다고 판결했다.

· 오전 4시 45분

3공수여단은 도청 소탕 작전 중 무장헬기 지원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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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총격 상황의 이해를 위해

총알이 관통된 유리창을 모형으로 연출하였다.


전일빌딩 헬기사격(헬기발포)

· 오전 5시 16분

500MD 공격헬기 도청 상공에서 위력 시위한다.

· 오전 6시

위력 수색 및 시위 비행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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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빌딩 메모리홀에 남아 있는 그날의 흔적 


천장 텍스의 탄흔이 한 지점에서 좌·우 방사형으로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탄환은 UH-1H에 장착된 M60 기관총으로 호버링(제자리 비행) 상태에서 연발 사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_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안전 감정서

헬기는 왜 전일빌딩을 사격했는가?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사격은 도청 진압 작전이 실행된 1980년 5월 27일 새벽에 이루어졌다. 계엄군이 전일빌딩을 제일 먼저 제압해야 했던 이유는 이곳을 시위대의 점령 상태로 내버려 두면 도청 진압군의 후방이 노출되기 때문이었다. 즉 전일빌딩은 작전병력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선점해야 하는 감제고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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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의 탄환_이혜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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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하늘 그날_정영창 작가 


전일빌딩245 메모리홀 입구에 들어서면 518민중항쟁의 그날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빗발치는 총탄을 마주한 기분을 아는가? 작품이라는 걸 알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상상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순수 미술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던 정영창 작가는 5.18을 계기로 인권과 평화를 대변하는 사회참여미술로 전환하게 된다. 메모리홀에 설치된 '검은 하늘 그날'은 본래 전일빌딩만 그려져 있다가 추후 벽면에서 총탄을 발견하게 되면서 추가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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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는 518민중항쟁 관련 사적지가 1호 전남대학교를 시작으로 29호 존재한다. 그곳에는 각기 다른 상처가 존재하고, 여전히 그날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이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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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홍보단 오월이들 활동 시작의 첫 미션이었던 518민중항쟁 바로 알기를 전달받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면 좋을까 고민했다. 사건의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건, 시간대별 있었던 사실을 순차적으로 서술하자였다. 놀랍게도 위 내용들은 전일빌딩245 메모리홀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실제 재판 기록물 등에서 적혀 있는 사실이다.

지난해 미얀마 사태와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을 마주하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금 깨닫는다. 지금의 자유는 국민들이 이뤄낸 결과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스러져간 많은 사람들을 위한다면 역사를 바로 아는 것에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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