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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이들 3기] 518민중항쟁 사적지 & 518민주화운동 10일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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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222-05-23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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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중항쟁 사적지

518민주화운동 10일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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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518민주화운동은 올해로 42주년을 맞았다.

선배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너희들이 80년대의 아픔을 아느냐 건넸던 518민중항쟁이 다음 달 5월 18일이면 42주년을 된다.

단순한 수치상으로 보면 42년이란 세월의 무게가 더해진 오래된 일 같지만 실제 느낌상으로는 얼마 되지 않은 일처럼 생생하다.

여전히 주위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이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518민주화운동 국가유공자를 폭도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지금도 서울 어느 곳 길거리 펜스에 광주 폭도라고 적혀 있는 글자가 적혀있고, 인터넷에서는 이상한 용어를 생산해서 518민중항쟁을 폄하하고 폄훼하는 불특정인들이 있다.

유튜브에서 무분별하게 떠도는 가십성 동영상만 보지 말고 518단체에서 만든 또는 공영방송에서 만든 제대로 된 자료 영상만 봐도 알 수 있는데 가짜 뉴스에 현혹되어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과거를 제대로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으니 과거와 비슷한 사건들이 유사하게 다시 발생한다.

국가가 국민에게 총을 겨누었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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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기록관

금남로

518민중항쟁 관련 기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이 가장 잘 되어 있다.

투사회보 등 각종 기록물과 작전 일지 등 원천 자료 외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 정부 기관과 군사 법정의 자료, 언론인들의 취재 수첩, 피해자 병원 진료기록 등 4,200여 권, 86만 쪽, 3,700여 컷의 사진 필름 등 등재 기록물을 전시 보존하고 있다.

518민주화 기록관은 인류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기록물의 연구, 전시, 교육 활동을 통해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정신을 전 국민, 전 세계인과 공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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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 동안 전두환 등 신군부, 반란 군부 세력의 권력 찬탈과 학살 만행에 저항했던 광주 시민들의 정의로운 항쟁

5.18민주화운동은 신군부의 무자비한 총칼 아래 막을 내렸지만 전 국민들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보상, 기념사업을 요구했다.

마침내 5.18민주화운동은 승리의 역사로 부활하여 전두환 등 반란 군부 세력의 단죄와 함께 2011년 5월 전 인류가 보존하고 기억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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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7일

항쟁 -1일차

1980년 5월 17일 21시 40분, 임시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선포안이 찬반 토론 없이 단 8분 만에 의결되었다.

정치활동 중지, 집회 및 시위 금지, 대학 휴교, 언론 검열, 파업 및 유언비어 유포 금지 등 모든 활동을 중지시켰다.

비상계엄 확대는 전국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신군부의 실제 목표는 광주였다.

계엄사는 서울에 1, 3, 5, 9, 11, 13공수여단을, 광주에는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를 즉각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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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항쟁 1일차

공수부대로 이루어진 계엄군은 한밤중에 광주 소재 각 대학으로 진입했다.

5월 18일 아침에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학생들이 전남대로 들어가려다가 계엄군으로부터 구타와 폭행을 당했다.

학생들은 도심으로 진출하여 시민들에게 계엄군의 폭압적 행위를 알렸다.

그러자 점차 시위가 확대되어 계엄군은 학생과 시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총검과 곤봉으로 폭행했다.

젊은 남녀들을 금남로에서 속옷만 입혀 놓은 채 고문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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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전 계엄 확대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민주화 시위를 시작하였다.

광주에서 시위 상황을 보고받은 육군본부 지휘부는 작전명 화려한 휴가와 함께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하라고 지시했다.

시위 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도로 주변에 있는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쫓아가 진압봉으로 강하게 타격했고 반항하는 기색을 보이면 공수대원 2~4명이 떼거리로 몰려들어 진압봉으로 때렸다.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짐짝처럼 군 트럭 적재함에 던져 넣었고 대검을 진압 무기로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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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9일

항쟁 2일차

학생과 시민들의 저항은 19에도 계속되었다.

계엄군의 만행은 더욱 잔인해졌으며 첫 희생자가 발생했다.

18일 공수부대원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한 당시 24세 청년 청각장애인 김경철이었다.

김경철은 충장로 제일 극장 골목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집단으로 두들겨 맞아 쓰러진 채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공수부대원들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굼뜬 그의 행동을 보고 일부러 그런다고 더욱 두들겨 팼고 그는 19일 새벽 3시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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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항쟁 3일차

20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에 증파되었다.

수만 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계엄군과 경찰이 물리력에 결사적으로 대항했다.

시민들은 심각한 광주의 상황을 알리지 않은 언론사와 방송국에 항의하다가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밤 광주 여기저기에서 계엄군이 발포를 했고 시민들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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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항쟁 4일차

21일 아침부터 시민과 계엄군이 대치하다가 차량 시위로 이어졌다.

여러 대의 버스에 올라탄 시위대는 도청으로 나아갔다.

오후 1시경 전남도청에서 애국가가 올리자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했다.

금남로는 시민들의 시신과 부상자들의 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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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26일

항쟁 5일차

주먹밥과 나눔의 공동체

시민군은 시민 보호에 앞장섰고 스스로 질서를 유지했다.

시민군은 도청, YWCA, 시민회관 등에 분산되어 있었고 지도부가 있던 도청에도 시민군과 수습대책 위원 등 약 400여 명이 출입했는데 식사 해결이 어려웠다.

주민들과 상인들ㄹ은 동네 단위로 식량을 모으고 모금한 돈으로 반찬거리를 만들어 도청으로 보냈다.

아주머니들이 손수 만든 주먹밥과 김밥을 바구니와 양은 대야 등에 담아서 지나가는 시민군 차량에 건네주는 모습이 항쟁 기간 내내 이어졌다.

피를 나눈 공동체

중상을 입은 시민들이 많아서 수혈할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이 들리자 각 병원 앞에는 헌혈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로 가득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광주 시민 모두가 함께 피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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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5일

항쟁 8일차

집단 발포를 목격한 시민과 학생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이 필요했다.

돌과 각목으로는 총칼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후 2시 30분경 아시아 자동차 관계자들은 시위대의 설득에 군용트럭과 장갑차를 내주었다.

차량들은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함평, 담양 등지로 달려갔다.

시위대는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 등으로 무장하였고 무장한 시위대는 지휘체계를 갖추고 광주시민회관을 본부로 삼았다.

시민들은 그들을 시민군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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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6일

항쟁 9일차

시민 수습위원회와 계엄 분소 간의 방문 협의 결과 보고가 열렸다.

총기를 반납하고 계엄사와 협상하자는 수습위원의 발언에 한 학생이 반발하여 연단으로 뛰어올랐다.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이대로 투항할 수는 없고 언제 계엄군이 쳐들어올지 알 수 없다며 강경하게 반대했다.

결국 수습위는 무기를 회수하기로 결정했는데 회수된 총기가 수천 정이나 되었다.

그중 200여 정을 계엄군에게 넘겨주고 상무대에 구금되었던 시민과 학생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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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항쟁 10일차 마지막 날

죽음의 행진 장렬한 산화

계엄군이 외곽으로 철수한지 4일 만에 다시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를 진입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26일 아침 변호사와 종교인 등 수습대책위 지도부는 도청에서 계엄군이 있는 시 외곽 바리케이드까지 죽음의 행진을 결행하여 계엄사령관 만나서 우리가 스스로 수습할 것이니 진압하지 말라 기다려 달라고 요구했다.

도청의 항쟁 지도부는 목숨을 건 최후의 항쟁을 결의했다.

그들은 진압 작전이 임박했음을 예견하고 여성과 어린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시내를 진압하고 있다는 긴급한 소식이 무전기를 통해 들려왔다.

새벽 4시 10분경 도청 진압작전의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시민군들은 최후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고 장렬하게 산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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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5.18민주묘지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께서 안장되어 있다.

처음 광주에 갔을 때 망월동 묘지였고 비 온 뒤라 신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이었다.

당시 환경이 그리 좋지 않아서 국가에서 어떻게 이렇게 대우하나 화가 났었는데 이제는 518민주묘지로 성역화하고 구묘역 신묘역으로 나뉘어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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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518민주묘지는 5월뿐만 아니라 일 년 365일 참배객이 찾는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앞당긴 민주 열사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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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마을

태봉 마을은 마을 안에 있는 태봉산에서 유래했다.

왕가에서 아기를 낳으면 온 나라를 다니며 길한 곳을 찾아 태를 묻고 태가 묻힌 산을 태봉산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은 공주의 태가 묻힐 정도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1980년 518 당시 마을 주민들은 우리 마을은 우리가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지역방위군을 편성하여 계엄군에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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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518민주화운동이 끝난 후 마을 전체가 계엄 당국에 의해 탄압을 받았고 40여 명의 주민들이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태봉 마을 주민들 모두가 518의 아름다운 투사였으며 피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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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쪽에 주먹밥 등 미니 벽화가 그려져 있어 태봉마을의 정신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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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마을

지난달 518민중항쟁 오월 홍보단 오월이들 발대식이 끝난 후 전일빌딩 245 10층에 위치한 5.18기념공간 메모리홀 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전시관에서 주남 마을 인근 버스 총격 사건을 알게 되어 검색을 해보니 참혹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주남마을 위령비에 찾아가서 참배를 드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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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3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3·7·11공수여단 부대원들은 5월 23일 오전, 화순으로 향하던 미니버스에 공수부대원들이 총격을 가한다.

버스에 탑승한 총 18명 중 15명을 사살하고 생존자 3명 중 중상자 2명을 인근 야산으로 끌고 가 총살하여 암매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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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공수여단 공수부대 출신 최영신씨와 유일한 생존자 홍금숙씨는 살아남아 88년 청문회에 증인 신분으로 참석하여 주남마을 인근 버스 총격 사건의 진실을 증언하였다.

1989년 5.18 청문회 당시 유수호 민정당 의원이 홍금숙 씨에게 기왕 결혼하려면 경상도 남자와 좀 결혼을 해서 이 쓰라린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증인이 그런 역사적인 사명. 그런 씨앗을 한 번 심어줄 용의는 없는가?라는 망언을 했다.

홍금숙 씨가 그러면 제가 의원님 아들과 결혼해도 허락해 주실 것이냐 묻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수호 의원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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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전남도청

구 전남도청은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 시민이 다 함께 일어나 시민에게 발포한 계엄군에게 대항한 곳이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에 맞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항했던 항쟁의 지도부가 있던 곳으로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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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광장 5.18 시계탑

518 시계탑은 알고 있다.

1980년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 518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광주시민의 고난을 지켜보았다.

시계탑은 자유의 기념물이자 한국의 민주주의의 시작을 상징한다.

매일 오후 5시 18분에 시계탑에서 울려 퍼지는 님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의 상황을 되살리면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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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518민주광장 내 분수대는 5.18 사적지이다.

원래 3월 31일 빛의 분수대 개막식 예정이었으나 더 좋은 작품으로 찾아오기 위해 개막식이 잠정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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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빌딩 245

전일빌딩245는 역사적 현장으로서의 건축형태와 공간을 245로 상징화하여 전일빌딩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의 선명한 탄흔이 건물 내외부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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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전일빌딩 245 9층과 10층은 518기념공간, 518메모리홀이다.

총탄 흔적 원형보존과 함께 1980년대 당시 금남로 일대와 전일빌딩 245를 중심으로 축소 모형을 제작하였으며 헬기 사격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멀티 어트랙션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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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 사격의 진실과 거짓, 왜곡의 역사, 가짜 뉴스, 전일빌딩 헬기 사격 가상현실 VR 체험 등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어 관람객들이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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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빌딩245 518기념공간 내에서는 오월어머니 사진전을 진행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어머니의 모습을 사건 현장에서 기록한 사진 작업으로 그들의 인생 역사를 함께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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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어머니집

1980년 5월 사랑하는 가족이 희생되었거나 또는 스스로 서슬 퍼런 군부 독재에 아랑곳 없이 민주화 투쟁 대열에 앞장섰던 여성이며 어머니들이 마음속에 묻은 고통을 치유하고 노후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이곳에 모여 안부를 묻고 서로 보살피는 장소이자 오월 정신을 부단히 계승해 나가는 공간이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 특히 518 민주화 운동에서 사랑하는 가족이 희생되었거나 본인이 피해를 당하고 살아가는 어머니들에게 건강한 노후의 삶을 제공하고 민주 인권 평화 5월 정신 계승을 위해 오월어머니집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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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어머니집은 518 구속자 가족 모임으로 시작하여 518 구속자 가족협의회와 1983년 민주화운동 구속자 가족협의회와 2001년 오월 어머니회로 변경되었다가 2006년 현재 명칭 오월어머니 집으로 바뀌었으며 518민주화운동 당시 가족 또는 본인이 피해를 본 어머니들의 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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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중항쟁 관련 사적지와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을 둘러보면서 교과서에서도 배울 수 없었고 신문, 뉴스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진짜 광주의 이야기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발포 책임자에 대한 처벌도 없었기에 아픈 역사가 끝맺지 못하고 있다.

42년이 지나도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는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을 아픔일 것이다.

어떤 이는 이제 그만 용서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자고 하는데 자기 잘못을 사과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가 가능한지 모르겠다.

과거와 작별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사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뻔뻔하게 사자 모욕을 하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던 발포 책임자 그자가 죽었지만 그 수하들이라도 꼭 죗값을 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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